기【記】
강계부(江界府) 회재 선생(晦齋先生) 사당기(祠堂記)
강계부(江界府)의 회재 선생(晦齋先生) 사당은 이 문원공(李文元公)을 제사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부(府)는 곧 선생께서 귀양살이하던 곳이다. 선생이 유배된 것은 가정(嘉靖) 정미년(1547, 명종2년)에 있었는데, 7년을 귀양살이 하다가 끝내 적소(謫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미 세상을 떠났어도 변방의 인심은 가슴에 새기고 잊지 못했는데, 만력(萬曆) 병자년(1576, 선조9년)에 희천(熙川)의 학자(學子) 김생 현(金生玹)이 마침내 한 지방의 사모하는 간절한 정성을 모아 묘사(廟祠)를 짓기를 청하였다. 안찰사(按察使) 김공 계휘(金公繼輝)가 듣고서 때늦은 것을 한탄하며 건축을 서두르니, 커다란 동우(棟宇)가 하루아침에 날아갈듯 향교의 왼쪽에 세워지게 되었다.
오호(嗚呼)라. 진실로 선생처럼 도덕이 높은 분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거사에 어울릴 수 있을 것인가? 인심이 똑같이 그렇게 여긴다는 것을 또한 징험할 수 있다. 대개 선현(先賢)을 종사(宗祀)하는 것은 예(禮)가 더할 수 없이 중하고, 풍성(風聲)과 기운(氣運)이 관계된 바가 얕지 않으므로, 반드시 군심(羣心)을 수합하여 익숙하게 들어본 뒤라야 거행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평생 서식(棲息)하던 지역이나 출입하며 벼슬하던 지방이라도 또한 감히 영건(營建)을 가벼이 논의할 수 없는 것이거늘, 하물며 저 궁벽한 절역(絶域)에서 견양(犬羊 오랑캐를 뜻함)과 이웃하는 곳임에랴. 몸이 촘촘한 그물[密網]에 걸려들어 얼음이 층층으로 얼고 눈발이 날리는 곳에 유배되어 홀연히 죽게 되었으니, 슬퍼해주고 울어주는 것만 해도 또한 족할 것이다. 그런데 능히 존모(尊慕)하고 추경(追敬)할 줄을 알아서 향화(香火)를 받들 곳을 마련하여 영원하게 전할 계책으로 삼을 것을 진정으로 원하니, 이 어찌 감화시킨 것이 깊어 흥기되는 것을 스스로 그만두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동남(東南) 지역에서 우뚝하게 나시어 정순(精純)한 자질을 품부 받으시니, 스승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초연히 홀로 학문으로 나아가 깊이 연구하고 힘써 실천하여 성역(聖域)의 정로(正路)를 분명하게 보고 일찍이 한 순간도 중단한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체용(體用)을 겸비하게 되고 그것을 미루어 남을 이루어 줌에 여유가 있기에 이르셨다.
천명(天命)에 응하신 인묘(仁廟 인종(仁宗))의 성신(聖神)으로 백성들이 거의 지치(至治)의 은택을 입을 뻔했는데, 1년도 안되어 오호(烏號)가 갑자기 떨어지니, 선생은 이미 귀문(鬼門)을 떠도는 혼이 되었다. 아아. 인사(人事)와 세변(世變)이 일정하지 않아 오도(吾道)가 행해지지 못하는 것이 이와 같도다.
서관(西關) 일로(一路)에서 사당을 지어 선현(先賢)을 제사지내는 곳은 오직 이 강계부와 희천뿐이니, 희천의 사당은 바로 김한훤(金寒暄 김굉필(金宏弼)), 조정암(趙靜庵 조광조(趙光祖)) 양 선생을 제사하는 곳이다. 선생은 도(道)가 같고 마음이 일치하므로, 사숙(私淑)하여 스스로 능히 추배(追配)될 수 있었다. 이 세 선생은 우뚝하게 태산교악(泰山喬嶽)과 같이 국조(國朝)에 정립(鼎立)하였다. 근래에 별도로 《유선록(儒先錄)》을 찬하여 특별히 인반(印頒)할 것을 명하였는데, 성묘(聖廟)에 배향하자는 논의가 여론과 함께 비등하여 소를 올려 임금께 호소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래로는 아동(兒童)과 주졸(走卒)들까지도 또한 모두 귀에 익숙하고 입에 익숙하니, 그 도의 높음과 덕의 성대함이 어떠하겠는가? 그런데도 생전(生前)에는 일신(一身)이 곤궁하고 유리(流離)하였으니, 아아, 또한 심하도다.
대개 대현(大賢)이 백년 내에 거듭 났으니, 하늘이 사문(斯文)에 뜻이 없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이미 내고서 비운(否運)을 뒤따르게 하여 그 온축된 바를 펼 수 없게 만들고, 난초가 꺾이고 옥(玉)이 타버린 뒤에서야 한갓 적막한 변방에서 빈 사당만을 숭상하게 하니,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옛날 이천(伊川) 정부자(程夫子 정이(程頤))는 도(道)에 조예가 이미 깊었는데, 《역전(易傳)》의 완성은 오히려 부주(涪州)로 한번 유배 가는 계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선생이 변방에 있으면서, 저술하신 것으로는 구인(求仁)과 관련한 기록이 있었고, 진수(進修)와 관련된 규범이 있었으며, 《대학(大學)》은 장구(章句)의 빠진 부분을 보완하였으며, 《중용(中庸)》은 구경(九經)의 뜻을 부연하였다. 정력이 깃든 문장은 숙속(菽粟)과 같은 맛과 포백(布帛)과 같은 문채가 아닌 것이 없었으니, 옛 성현을 잇고 후학을 개도하는 방법이 여기에 있었다. 그러니 선생은 진실로 해동(海東)의 정씨(程氏)이요, 넘실대는 압록강(鴨綠江)은 실로 선생에게는 하나의 부강(涪江)이었던 셈이다. 이적(夷狄)의 환난(患難)이 진실로 철인(哲人)의 횡액(橫厄)과 같거니와, 현재 처한 상황에서 스스로 형통한 도가 있어서 도리어 그 사공(事功)의 아름다움을 조발(助發)할 수 있게 되었다. 미언(微言)과 지훈(至訓)이 아래로 백세토록 전해져서 전현(前賢)과 후현(後賢)이 마치 부절(符節)을 합한 듯하니, 천의(天意)를 알 수는 없으나, 혹여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다만 이천(伊川)은 살아서 돌아왔으나, 선생은 객지(客地)에서 돌아가셨다. 고인이 이르기를,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선생의 도에 있어서 누가 될 수 있겠는가? 서원(書院)이 마침내 서만(西蠻)에서 세워지고 새로운 사당이 동삭(東朔)에서 세워지니, 함께 옳다고 여기는 마음은 시대에 고금(古今)이 없고 지역에 피차(彼此)가 없는 것이다. 과연 누가 그렇게 시키는 것인가?
선생의 손자 준(浚)이 동경(東京 경주(慶州)를 달리 이르는 말)에서 왔다가, 마침 김생(金生)을 도하(都下)에서 만나 이 사당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슬픔을 금하지 못하였다. 김생이 이르기를, “군(郡)의 사당에는 이미 기문(記文)이 있는데, 부의 사당은 유독 그렇지 못하다. 어찌 도모하여 후인으로 하여금 고찰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준 역시 내가 선생에게 있어서 인척간이라는 것을 알기에, 내 집 문에 이르러 그 일을 고해주고 이어서 기문을 위촉하였다. 나는 불각 중에 경탄하며 일어나 김생을 맞이하여 상세한 것을 물었다. 그러나 나는 선생을 아는 자가 아니니, 어찌 감히 한 마디 말을 돕겠는가? 다만 이른바 천의(天意)는 헤아릴 수 없고 인심(人心)은 속일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삼가 일찍이 느끼는 바가 있었기에, 문장이 졸렬함을 혐의하지 않고 그 설(說)을 적어 본다.
김생은 당시에 강학(江學 강계부의 향교(鄕校))을 맡고 있었는데, 모양은 순박하나 바탕은 중후하여 말을 내는 것이 진지하였다. 이 사람은 곧 서새(西塞 서쪽 변방)의 수재로서, 선생께서 살아계실 적에 1년 동안 장구(杖屨)를 배종하였다고 한다. 두 사당을 앞장서서 세운 것은 공적이 매우 가상하거니와, 이미 군기(郡記)에서 서술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자세히 적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