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남 실기에 관해서는 승모 대부께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판관공파 공식입장이 아니고 문제 발단에 장본인으로서 저의 개인적인 입장을 밝히겠습니다.
이문제는 시간을 두고 전문중이 머리를 맞대고 사실 확인을 위해 찾아보도록노력해야 할것이라고 생각 하고 있습니다. 판관공 종중에 입장도 저의 생각과 같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외숙부들이 아니고 친숙부란 사실이 제개인적인 생각은 분명한것 같습니다. 판관공 묘갈명 기제문 승지공기제문 에도 (승지공 기제문 원문참조 ) 기록되어 있고 수백년동안 전해 오든것을 83년부터 고양 덕동실기를 만들면서 소설쓰듯이 추측하고 안동부사 임사록을 찾아 존고모부를 따라 낙담하셨다고 다시쓰니 그당시에도 의문을 제기 했으나 그당시 44세인 제가 원로들에 결정에 이것은 아니라고 혼자만 생각하고 있었으나 요즘 소고공 문집을 정리하다 보니 이것은 아니구나 분명 고모라고 쓰여있고 친백숙부라고 쓰여있음
그리고 시외 해외 경외 라고 흔히 쓰이는 말이고 국문이나 영문이나 띄어쓰기를 잘못하면은 아주 다른 해석을 할수 있습니다. 예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면은 방에 들어가는지 가방에 들어가는지 알수없고 한문은 더욱 어려워 달아쓰기 때문에 묘갈명도 잘못해석 한듯함 (족보 경신보 세적편에 묘갈명 참조 요망)
3명에 백숙부와 고모가 5명이나 있는데 존고모부 따라 낙남하셨다니 상식적으로 저로써는 이해가 않되는 일이며 외숙부님이 길렀다는 것은 누가 뭐래든 나는동의할수 없습니다.
판관공 친가에 조부님 평도공은 공신으로 부친 참판공도 감사 참판을 역임했지만은 재산은 모으지 아니한듯 하며 백숙부님들도 음사로 높은 벼슬은 아니지만은 관리로 여기저기 지방에 근무하면서 생활에는 큰불편이 없는 듯하고 5명에 고모들을 조사해 보니 우리보다 가정환경이 좋았습니다.
문제에 고모부 양양군은 경상좌도 절도사 무신으로 종이품이며 문신 종이품 경상감사와 동급이며 상당히 높은 벼슬이고 안동진에 경상좌도 군영이 있었다고 하고 예천에 동생사직공 부모도 예천에 사셨으면 관리로 부임한 이외에도 안동 예천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예로 개국일등공신 영의정 삼봉 정도전도 아버지 정운경이 봉화 사람인데 영주 단양우씨 처가에 와서 살다가 처가곳에 장사지냈고 삼봉문집을 읽어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3년동안 시묘살이한 기록이 있고 휴직하면은 수시로 영주에 내려와 있은 기록이 있음 그러나 삼봉자신은 산소도 없고 출생연대도 없고 죽은날은 1차왕자난때 방원에게 피살됨 영주사람들은 영주출생이라고 하고 단양사람은 단양 출생이라고 하고 한양삼각산 밑이라고도 하고 학자마다 다른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살든집은 종로구청 자리라고 표석이 있음
우리 선조 참판공 휘 형께서도 안동에서 처가 예안김씨 이조 판서 하시던 휘 김담에 동생에 사위가 되어서 안동에서 영주로 이거함 그리고 소고선조도 외가 선산에 장사지냄
판관공 처가 흥양유씨들 족장(族葬)하는 곳이란 처가사람들 선영이라는 뜻이라고 사료됨 그당시 장남이 아니면 딸도 재산 분배도 아들과 별 차별이 없고 사위도 외손자도 처가선영에 장사지내는 것이 비일비제함을 알수있음 낙남하신지 사대동안 실전된 산소를 소고공 형제분이 경자년에 함께 대과에 급제해서 환로에 나오면서 그때부터 판광공파가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판관공 산소도 처가산에 무쳤기때문에 소고공이 여주 목사때 찾아 치석도 하고 위토도 장만해서 제사 지낼수 있도록 만듬
소고공께서 승정원 사관으로 주서 우승지 좌승지 도승지로 오래 근무하셨으며 주서는 직접 승정원 일기를 쓰시고 사관으로 사초도 기록하셨다고 합니다. 승정원 일기는 일발인이나 특수한 관리가 아니면은 접할수 없고 사초는 사관이외에 국왕도 볼수 없었다고 합니다. 평도공 정안후지는 관리들에 이력을 승정원에서 찾아 생졸연대와 벼슬도 기록 했다고 쓰여있습니다.
참판공 휘규 고조부 처가댁 원주변씨들이 도중에 사화로 가세가 몰락해 휘 변안렬공에 묘표도 쓰시고 자기들에 조상에 이력도 찾아주었다고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방관으로 여러곳을 다니시면서 곳곳에 자취를 남겼으며 벼슬을 그만두면 곧바로 고향에 돌아와 많은제자와 영주고향에 유풍을 진작시키고 군민을 교화해 영주군지나 왕조실록에 기록되어있음 직계후손인 우리도 남이 말해 주어 아는일이 많고 소고공에 문집 판관공 기제문에도 분명 고모따라낙남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판관공 자료를 찾다보니 1455년 세조 1년12월 27일 판관공께서 주부[종6품관] 으 로 발령받은 기록이 있습니다.(11세때 )그뒤 홍주판관으로 가셨다는데 판관은 정5품 2단개 승진하시고 홍주[지 금홍성]연세는 20세전인 것은 확실하고 판관 발령은 찿지못하 엿습니다
승정원 일기는 국보 303호로 분량도 왕조실록 4배라고 하고 왕조실록 보다 상세히 기록 돼었다고 하나 임진때 방화로 불타 없어지고 지금 남은것은 인조 이전것은 없어지고 인조이후것만 보관되어 있고 국보일뿐만 아니라 전적류 필사본 일기류가 세계적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어있습니다. 우리 종가 많은서적도 화재로 없어지고 승정원 일기만 남아 있어도 대략은 짐작 할수 있었을텐데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얼마전 부솔을 부수라고 써야한다고 하고 수빈을 유빈으로 고쳐야 한다고 하고 평도공을 평탁으로 읽어야 한다고 하는데 부솔공 후손들에 의하면은 수백년동안 불려 왔던것을 그게 무슨소리냐고 반문하고 수빈도 왕조실록이나 승정원 일기에 정조 14년 6월18일 순조탄생등 많은 기록이 전부 수빈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국문으로 진향문에 유빈으로 쓰여 있으니 유빈으로 고쳐야 한다고 하는것은 이런 논쟁은 극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도공도 시호는 탁으로 읽어야 한다고 사전에 쓰여 있는것을 저도 보았으나 우리가 언제 평탁으로 말할적도 없고 대다수가 도로 발음하고 극소수가 탁으로 발음함
내가 국민학교 5학년때 부친께서 졸지에 교통사고로 사망하시고 숙부님 댁에 가서 자라 4남매가 승지공 같이 어린시절은 불우했으나 외삼촌댁이 우리친가보다 풍족했지만 모친도 살아계셔도 외삼촌 댁에 의지 하지는 아니 하였습니다. 승지공에 어린시절과 저의 처지와 비슷합니다. 그러니 모든것이 이해할것 같습니다.
소고선조 이후 필사본으로 상세히 기록해 놓은 덕분에 누구에 산소인지도 모르고 제사 지내는 4기분묘중 3기는 찾아 7대조 형제분인 절손된 방조 산소에 큰댁주손 정우씨가 치석도 했고 오래된 조상에 서책들을 지금까지 잘보관해준 족질 정우씨에 정성에 깊이 감사드리며 주손에 성의에 마음 든든하게 생각 하고 있습니다. 이번일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 주신 청주 찬무족제에게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조들이 기록해 놓은 친필을 대하면 왠지 마음이 숙연해지고 우리집에 보관중이던 서책들은 다잊어버리고 몇권에 책을 보니 참으로 가문에 귀한 물건임을 알았습니다.조상에 유물을 지키는 것은 가문을 지키고 문중을 지키고 나아가 나라에 역사를 지키는 일인데 이혼란한 시기에 우리것을 잊어버리면은 모두를 잊어 버린다는데 나는 그렇겟 오래 보관된것을 불후한 어린시절로 인해 정성들여 써놓은 조상님들에 서책을 잊어 버렸으니 조상에게 큰죄를 지었습니다.
한문은 할아버지께 천자문도 배우다 말았고 학교에서 겨우 일주일에 한시간 배운실력이 천자문도 다 모릅니다. 선조들에 기록해 놓은 책을 보면은 한장을 해석하느라 옥편을 찾아도 없는 글자가 있고 고민하다가 뜬눈으로 날을 밝힌적도 있습니다. 컴퓨터 배우느라 타자를 치다 보면은 오타 투성이고 장님 피아노 치듯하고 국문도 쓰다보면은 문맥도 잘맞지 아니하고 국문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잘못된 곳이 있더라도 읽어주시고 승모대 부님 전화번호 알려주십시오 저의 번호는 010-4259-7678입니다 새해에는 모든 종원 복많이 받으시고 바라는 일 성취 하시기를 기원하면서 두서없이 씁니다
인천우거에서 박찬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