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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명장 유탁
조회 : 7780 (2009-07-25 20:58:50) 이름 : 박승모

아래 글은 우리 판관공파의 파조(派祖)이신 판관공 휘 병균(秉鈞) 할아버지의 배위(配位)(부인)이신 흥양유씨(興陽柳氏/高興柳氏) 할머니의 증조부(曾祖父)이신 고려의 명장 유탁(柳濯) 할아버지와 관련되는 내용입니다. 유탁 장군의 휘자는 소고(嘯皐) 할아버지께서 지으신 <판관공 묘갈문>에도 나타납니다. 아래 이야기 속에는 또한 반남박씨 6세이신 평도공 휘 은(山+言) 할아버지의 외숙(外叔)이 되시는 목은(牧隱) 이색(李穡) 할아버지도 나오십니다. 역사 공부도 하시고 우리 판관공파와 관련되는 이야기도 알아두시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 판관공파 후손들의 몸속에 유탁 장군의 피가 조금은 흐르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해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글을 써 주신 조선일보 문화부 이한우님께 감사드립니다.


충신과 간신 종이 한장 차이

이 한 우


할아버지 유청신은 ‘간신’으로, 손자 유탁은 ‘충신’으로


‘고려사’ 간신(姦臣)전에 이름이 올라 있는 고려 말의 유청신(柳淸臣·?~1329)은 이름부터 역설적이다. 이름은 맑은 신하인데 역사에는 간사한 신하로 분류된 것이다. 유청신의 집안은 대대로 천민집단인 부곡(部曲)을 관리하던 아전이었다. 지방의 말단 관리라 할 수 있다. 고려에서는 부곡 아전의 경우 아무리 큰 공을 세워도 5품 이상 오를 수 없도록 돼 있었다. 유청신은 개인의 탁월한 능력으로 이 신분적 장벽을 뛰어넘는다.


‘고려사’는 유청신의 능력으로 ‘탁 트인 마음(開悟)’ ‘담력(膽氣)’ ‘외국어 능력(蒙語)’을 꼽았다. 유청신은 당대의 실력자 조인규를 도와 원나라를 왕래하며 응대를 능숙하게 했다. 마침내 충렬왕으로부터 “본인에 한해 3품까지의 승진을 허가한다.”는 교서를 받고 낭장(오늘날의 영관급 장교)에 임명된다. 충렬왕은 유청신 집안에서 대대로 관할하던 전라도 고이(高伊)부곡을 고흥현으로 승격시켜 주었다.


얼마 후 다시 조인규의 추천으로 장군에까지 승진한 유청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충렬왕ㆍ 충선왕 부자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었다. 처음에는 부자 양쪽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워 선위와 복위가 반복되는 가운데도 유청신의 직위는 계속 올라 마침내 충선왕 때는 첨의정승(僉議政丞)에까지 오르게 된다.


유청신의 관복(官福)은 여기까지였던 것 같다. 1313년 충숙왕이 즉위하면서부터 그는 배척의 대상이 된다. 이에 분노를 느낀 유청신은 또 다른 ‘간신’ 오잠과 함께 원나라 조정을 상대로 충숙왕 폐립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폐립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유청신은 원나라에 머물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에 대한 ‘고려사’의 평이다. “유청신은 불학무지한 자로 임기응변하는 재간이 있었으며 세를 믿고 국권을 농락해서 나라에 해독을 끼쳤다.”


고려 말 충(忠)자 돌림 임금들이 통치하던 시절에는 충간(忠姦)이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차이일 때가 많았다. 임금 자신이 원나라에 충성을 맹세하고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자간의 권력투쟁도 결국은 원나라가 어느 쪽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끝나곤 했다.


그랬기 때문인지 유청신의 아들 유유기(柳攸基)는 훗날 밀직판사에까지 오른다. 고려 때의 밀직사는 조선시대의 승정원과 중추부 등을 겸했던 핵심기관으로 판사는 2품에 해당하는 고위직이다. 유청신의 ‘행적’이 후대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유청신은 우리나라에 호두나무를 처음으로 들여온 인물로 전해지기도 한다.


유청신의 ‘못다 이룬 꿈’은 손자 유탁(柳濯·1311 ~1371)에 이르러 마침내 실현되는 듯했다. 할아버지를 닮아 “대담성이 있고 무예에 능했던” 유탁은 무관직으로 진출해 공민왕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군대를 엄숙하게 관리하고 군사들과 고락을 같이하여” 당시 기승을 부리던 왜구들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해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 갔을 때는 경상도 병마사로 공민왕을 호위했고 공민왕 축출음모인 흥왕사 난 때는 진압 1등 공신으로 마침내 문하시중(조선의 영의정)에 오른다. 할아버지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유탁은 “몸가짐이 무겁고 풍모가 아름답고 거동이 볼만했다”고 한다. 성품 또한 강직했다. 그 강직이 화근이었다. 노국공주가 죽자 공민왕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공민왕이 공주의 영전(影殿)을 화려하게 지으려 하자 유탁이 정면으로 반대했다. 백성의 고통이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내가 외람되이 수상 된 입장에서 임금의 봉록을 먹으면서 어찌 마음속으로 그릇되게 여기면서 임금이 과오를 범하게 하여 비난을 후세에 남길 것인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임금에게 간하지 않을 수 없다.”


간하는 글이 올라가자 공민왕은 유탁을 투옥시켜 버렸다. 게다가 신돈이 나서 유탁을 죽여야 한다고 하자 공민왕은 이색으로 하여금 군중에게 고하는 글을 짓도록 명했다. 유탁을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이에 이색은 “유탁에게는 죽일 죄가 없으니 감히 명령을 거행하지 못 하겠다.”고 버티자 공민왕은 이색도 투옥시켜버렸다.


얼마 후 유탁과 이색은 풀려나기는 하지만 유탁은 결국 신돈과 한패였다는 누명을 쓰고 참수형을 당한다. 결국은 영전 공사 중단을 건의한 데 대한 공민왕의 보복이라는 게 ‘고려사’의 판단이다. 그래서 유탁은 ‘간신’으로 분류된 할아버지와 달리 ‘충신’ 전에 실렸다.


조선 개국 후 태조 이성계는 꿈에 유탁을 본다. 태조의 꿈에 유탁이 나타나 둘째 아들 유습(柳濕·1367~1439)에게 벼슬을 줄 것을 청했다. 이상하게 여긴 태조는 유습을 과의상장군에 특진시켰고 유습은 훗날 전라도 도절제사, 중군도총제 등을 거쳐 대마도 정벌 당시 우군(右軍)원수로 공을 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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