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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유진사"
조회 : 6535 (2009-11-30 12:29:01) 이름 : 박승모
 

순유진사(諄誘進士)


반남박씨 경신세보(1980년刊) 제1권 총편 제1쪽에 나오는 3世 증참의공(贈參議公) 휘 윤무(允茂) 할아버님의 방주에 보면, “諄誘進士良醞令同正(순유진사양온령동정)”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는 “순유진사(諄誘進士)에 급제하여 양온서(良醞暑)의 영동정(令同正)을 지내셨다”라는 뜻으로 해석될 듯하다. (참고: 양온서는 고려 시대 궁중에서 필요한 술과 감주를 당당하던 부서. 영(令)은 양온서의 장(長)을 가리키며 동정(同正)은 고려 시대의 동정직(同正職)을 나타낸다. 동정직은 봉록(俸祿)과 직사(職事)가 없는 산직(散職)으로 일종의 명예직이었지만 대우는 관인과 거의 동일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경신세보 세적편 20쪽 <진사공(進士公)[즉 증참의공] 휘(諱) 윤무(允茂) 사적(事蹟)>에 나오는 번역문은, “휘(諱)는 윤무(允茂)이고 자(字)는 순유(諄誘)이며 진사(進士)로서 양온령동정(良醞令同正)이오”로 되어 있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諄誘進士”의 “諄誘”를 증참의공(진사공)의 자(字)인 것처럼 번역하였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면, 이는 오역(誤譯)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문헌 중에서 진사공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반남박씨 문중의 역사적 출발점이 되는 밀직공(휘 수 秀)의 고려 공민왕 22년(1373) 계축(癸丑) 호적(戶籍)이다. 이 계축년 호적에 밀직공의 부친인 진사공에 대한 기록은 “父進士良醞令同正允茂(부진사양온령동정윤무)”로 되어 있으며 이것이 전부이다. 따라서 임오보(1642년) 역시 진사공의 방주에 “進士良醞令同正 贈吏曹參議(진사양온령동정 증이조참의)”로 기록하였다. (참고: 이조참의의 증직은 조선에 들어와서 내려진 것이다).


그런데 1683년에 간행된 계해보에 와서 “進士” 앞에 “諄誘”가 보태어져 “諄誘進士”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계해보는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서계공(西溪公) 휘 세당(世堂)과 현석공(玄石公) 휘 세채(世采)께서 쟁쟁한 젊은 실력파이셨던 정재공(定齋公) 휘 태보(泰輔), 둔계공(遯溪公) 휘 태징(泰徵) 등의 실무진과 함께 장장 17년에 걸쳐 이룩한 위업(偉業)이었다. 계해보는 각 계파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가보(家譜)는 물론, 역사적 문헌들과 다른 성씨들의 족보들에 대한 광범위하고도 세밀한 대조, 분석, 확인을 통해 마침내 이룩한 불후의 작품으로서 이후의 모든 세보들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필자는 계해보 편찬자들께서 “進士” 앞에 “諄誘”를 붙이신 당시의 사정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암시한 바와 같이 계해보 편찬자들의 면면을 고려할 때 분명히 어떤 근거가 있었을 것으로 믿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추후에 더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다만 필자가 여기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諄誘”가 진사공(휘 允茂)의 자(字)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자(字)를 기록할 때에는 반드시 그 앞에 “字”라는 표시를 하게 되어 있는데 “諄誘” 앞에는 그런 표시가 없는 것으로 보아 字가 아닐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다음으로, 세보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1세에서 8세에 이르는 상대(上代) 선조들 중에서 字가 표기된 선조들은 5세 상충(尙衷: 字 誠夫), 6세 은(訔: 字 仰止), 8세 병균(秉鈞: 字 子平), 치(䎩: 字 子治), 경(耕: 字 伯牛), 숭질(崇質: 字 仲素) 등 6분에 불과하다. (참고: 경신보에는 6세 힐(詰), 7세 충(冲), 현수(玄修), 8세 두언(杜彦) 등에도 字가 표기되어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기로 한다. 字가 본격적으로 표기되기 시작하는 것은 9세 이후이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상대적으로 상당한 인적 정보를 알 수 있는 4세 밀직공의 경우에도 字가 기록되지 않았는데 그 부친이 되는 진사공의 字가 알려져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판단된다. 이와 같이 몇 가지 정황을 면밀히 고려해 보면, “諄誘”를 진사공의 字로 보는 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는 점을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諄誘”는 대체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까?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은 “諄誘”를 별도로 분리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進士”와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諄誘進士”를 한 단위로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諄誘進士”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년록(同年錄)(= 방목 榜目)이며 고려 국자감시(國子監試) 동년록으로는 유일한 자료라고 하는 우왕 3년(1377)의 동년록에 나오는 합격자의 경력(또는 응시자격)에 “諄誘學生”이라고 표시된 사람(2인)이 발견된다. 허흥식 교수의 판단에 따르면(허흥식 1996, <서지학보> 17), 여기서 말하는 “諄誘”는 고려의 성균관(국자감) 유학부(儒學部) 3학(三學), 즉 국자학(國子學), 태학(太學), 사문학(四門學) 중에서 사문학(四門學)을 일컫는 용어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순유학생”은 성균관(국자감) 사문학에서 공부한 학생을 일컫는 말이라고 보았다. (참고: 국자학, 태학, 사문학 등의 구분은 학문상의 전공분야에 따른 구분이라기 보다는 입학생들의 신분상의 차이에 따른 구분으로 보인다. 국자학은 3품 이상, 태학은 5품 이상, 사문학은 7품 이상 관리들의 자손들이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高麗史>).


본래 국자감에서 사문학을 담당한 교관(敎官)을 “사문박사(四門博士)”라고 하였는데 충렬왕 30년(1304)에 사문박사를 “순유박사(諄諭博士)”로 고쳐 불렀다는 사실, 그리고 <玉篇>에 “諭”는 “誘”와 같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기록을 고려할 때 허흥식 교수의 판단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고 본다.


한편, 고려 시대 예부시(禮部試: 조선의 문과에 해당)의 예비 시험 성격을 띠었던 국자감시(國子監試)는 감시(監試), 사마시(司馬試), 진사시(進士試) 등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그 합격자는 진사(進士)가 되었다. 국자감시에 합격한 진사는 그 분야에 따라 국자진사(國子進士), 태학진사(太學進士), 사문진사(四門進士) 등으로 분류되었는데 순유박사가 사문박사를 가리켰듯이 “諄諭進士”는 사문진사를 일컬었거나 태학진사(허흥식 교수의 주장)를 일컫는 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순유진사가 사문진사를 가리키는지 태학진사를 가리키는지는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위의 고찰에서 우리는 한 가지 분명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즉 “諄誘”는 진사공(증참의공)의 字가 아니라 국자감시에 합격한 진사공(증참의공)의 진사 칭호의 일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순유진사”는 고려 국자감시(즉 진사시)에 합격한 진사들의 분류명(分類名)으로 보는 것이 옳으며, “순유”를 진사공(휘 允茂)의 字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2009. 11. 30. 鶴山 謹記.

(8世 判官公 諱 秉鈞 16代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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