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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양공 (세보 방주)
조회 : 9741 (2009-12-15 22:00:17) 이름 : 박승모

세양공의 방주(傍註): 도순찰사(都巡察使)와 관찰사(觀察使)


경신(1980) 세보 제1권 총편 3쪽 세양공(휘 강 薑)의 방주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癸亥譜曰錦城先生案公世祖丁丑(一四五七)以都巡察使按本道云今考方伯錄公名不載湖南而文宗辛未(一四五一)按海西兼本州牧云○

○계해보왈금성선생안공세조정축(일사오칠)이도순찰사안본도운금공방백록공명부재호남이문종신미(일사오일)안해서경본주목운○


이 방주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방주를 붙인 시기를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언뜻 봐서 “錦城先生案”부터 끝 “本州牧云”까지 계해(1683) 수보 때 붙인 것이고 맨 첫 부분 “癸亥譜曰”은 그 뒤에 붙인 것으로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전체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계해보에서 붙인 부분은 “錦城先生案”부터 “按本道云”까지이고, “今考方伯錄”부터 “本州牧云”까지는 그 뒤의 세보, 즉 병술보(1766)에서 붙인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위의 방주는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겠다.


“계해보에서 이르기를, ‘금성(錦城: 나주를 말함) 선생안(先生案)은 공(公)(세양공)께서 세조 정축년(1457년)에 도순찰사(都巡察使)로 본도(本道: 전라도를 말함)를 안찰(按察)하셨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번에(즉 병술보를 편찬하면서) 방백록(方伯錄)을 살펴보니 공(公)의 이름이 호남(湖南: 전라도)에(즉 호남 방백록에) 등재되어 있지 않고, 문종 신미년(1451년)에 해서(海西: 황해도를 말함)를 안찰하시면서 본주(本州: 황해도의 본주, 즉 해주를 말함) 목사를 겸하셨다고 한다.”


선생안(先生案)이란 안책(案冊)이라고도 하는데 관아에 비치된 전임(前任) 관리의 신상 정보를 기록해 놓은 책으로, ‘금성선생안’은 역대 나주목사 명부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그리고 방백록(方伯錄)은 관찰사(觀察使) 명부를 말하며, ‘안(按)’이라는 표현은 중앙에서 지방에 파견된 관찰사 급(級) 이상의 관료가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나타낼 때 흔히 쓰는 표현으로 이는 ‘안찰사(按察使)’, ‘안렴사(按廉使)’ 등에서도 발견되는 글자이다.


그런데 위의 방주에서 흥미로운 것은 계해보 방주의 내용이 뭔가 석연치 않다는 인상을 주는 표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병술보에서 ‘구보의 기록에 의하면, 세조 정축년에 도순찰사로 전라도를 안찰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지금 와서 살펴보니 전라도 방백록에는 세양공의 이름이 없고, 다만 문종 신미년에 황해도 관찰사로 해주 목사를 겸하셨다고 되어 있다.’라고 기록함으로써 금성선생안의 내용에 대해 약간의 의심(?)을 보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자. 먼저 문종 즉위년(1450년) 8월 7일자 기록에 보면, 세양공께서 ‘황해도(黃海道)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제수된 기록이 있고, 다음 해 신미년(1451년) 3월 15일자 기록에 보면, ‘황해도 도관찰사(都觀察使) 겸(兼)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 판해주목사(判海州牧使)’로 제수된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이 부분은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겠다.


다음, 세조 정축년(1457넌) 1월 16일 기사를 보면, “충청도(忠淸道)ㆍ전라도(全羅道)ㆍ경상도(慶尙道)의 도순찰사(都巡察使) 박강(朴薑)과 부사(副使) 구치관(具致寬) 등이 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흔히 하삼도 ‘下三道’라고 함)의 여러 진(鎭)과 여러 포(浦)를 순심(巡審)하고, 당연히 행할 사건(事件)을 아뢰어, 하나씩 하나씩 조목조목을 열기(列記) 하였다. .....”라는 기록이 나온다. 즉 세양공께서 하삼도(下三道)를 안찰하시고 개선해야 할 사항들을 조목조목 임금에게 보고하신 내용이다. 따라서 세양공께서 하삼도의 도순찰사에 제수되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명백한 사실임이 확인된다.


그런데 왜 병술보 이후의 세보들은 이렇게 명백한 사실을 의심(?)하는 듯한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는 바로 도순찰사와 관찰사(방백)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 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관찰사(觀察使)는 흔히 감사(監司), 방백(方伯)으로 불리며 그 외에도 도백(道伯), 도신(道臣), 외헌(外憲) 등으로 호칭되기도 한 종2품직 지방 장관으로 중앙에서 각 도(道)에 1명씩 파견되었다.


한편, 도순찰사(都巡察使)는 지방에 변란이 났을 때 지방의 군무(軍務)등을 안찰하기 위해 임시로 파견하던 벼슬로 대개는 지방의 관찰사(觀察使)가 겸임하여 순찰사(巡察使)라고 하였는데, 방주에 나타난 의문(?)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 순찰사를 파견해야 할 경우가 생기면 일반적으로 해당 지역의 관찰사가 순찰사를 겸하게 하였으므로 금성선생안(錦城先生案)에 세양공께서 도순찰사로 본도(즉 전라도)를 안찰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당연히 전라도 관찰사였을 것이라 기대(?)했으나 호남(전라도) 방백록(관찰사 명부)에는 세양공의 이름이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들을 살펴보면, 순찰사를 관찰사가 항상 겸임하였던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그 명칭에서도 드러나는데 <속대전(續大典)>에 따르면, 중앙에서 순찰사를 파견할 때, 의정(議政: 정1품)을 파견할 경우에는 도체찰사(都體察使)라 부르고, 종1품 또는 정2품직 관료를 파견할 경우에는 도순찰사(都巡察使)라고 부르며, 종2품직 관료를 파견할 경우에는 순찰사(巡察使)로 부른다는 규정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관찰사보다 높은 품계의 관료를 파견하는 경우에는 관찰사를 겸임시키지 않고 중앙의 고위 관료를 별도로 파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세조 2년(1456년) 7월 21일 <실록>의 기사를 보면, 극심한 흉년으로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리자 세조는 하삼도(下三道)에 순찰사를 파견하는데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박강(朴薑)을 도순찰사로, 이조참판(吏曹參判) 구치관(具致寬)을 부사(副使)로 임명한 기록이 나온다. 이어서 그해 9월 15일 기사를 보면, 세조가 도순찰사 박강 일행의 보고를 받고 그 활동을 칭찬하면서 백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좀 더 자세히 살펴서 보고하라는 유시(諭示)를 내리고 있다. 그런데 같은 기사에 보면, 세조는 경상도 관찰사와 전라도 관찰사에게 각각 구황(救荒)에 힘쓸 것을 명하는 유시를 별도로 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이 기사에 의하면, 세양공께서 도순찰사로 임명되어 하삼도를 안찰할 때 전라도, 또는 경상도 관찰사를 겸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참고: 당시 세양공께서는 정2품직인 지중추원사였기 때문에 종2품직인 관찰사보다 품계가 높았다).


아마도 병술보(1766년)의 방주를 기록하셨던 분은 <왕조실록>에 접근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이미 30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라 사실을 확인해 줄 수 있는 믿을만한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세양공의 방주는, ‘순찰사는 곧 관찰사가 겸임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판단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감히 추측해 본다. 이번 수보(修譜)와 더불어 간략하게나마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을 부기(附記)함으로써 방주에 대한 후손들의 의문을 풀어 주는 것이 어떨까 싶다.


부기(附記):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세보 편찬에 임하는 선조들의 신중하고 세밀하신 태도이다. 그냥 지나쳐도 될 만한 것이지만 조금이라도 의문이 있으면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후손들로 하여금 다시 상고(詳考)할 수 있게 하셨다는 점은 오늘날에도 본받아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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