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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족보와 박미 ]
조회 : 5793 (2006-08-25 17:39:50) 이름 : 박춘서

[ 첫 족보와 박미 ]

반남박씨의 첫 족보는 壬午譜 (임오보)로 1642 (인조 20년)이며,족보 발행시 서문을 쓴 선조는 박미(朴彌) 1592(선조 25)∼1645(인조23)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반남박씨14세손으로 자는 중연(仲淵), 호는 분서(汾西), 참찬 동량(東亮)의 아들이며, 선조의 부마이다. 서문에서 박미는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내력의 문헌이 적어서 가까이 징빙할 수 있는 내용으로 별조(別組)를 삼아 보첩을 만들었다. 그래서 근래에 영남에사는 종인(宗人)들이 보첩을 만든 것이 완미(完美)하였고, 대하(大夏)氏가 만든 보첩도 상세하긴 하였으나, 2가(家)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러던차 영천군수로 있던 종형(從兄) 호(濠)氏가 앞장서서 회무(檜茂)氏등과 함께 종인들에게 창도(倡導)하여 집안의 보첩을 합쳐 정리하고 비갈(碑碣), 문집, 문헌, 휘일(諱日)등을 정리하여 집대성하였고. 1641년(인조19)가을 종형 호(濠)氏로 부터 서문 부탁을 받고 서문을 쓰게되었다고 했다.박미는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으로, 1603년(선조 36)선조의 다섯째딸인 정안옹주 (貞安翁主)와 혼인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하여졌다. 1605년 친공신적장자 (親功臣嫡長子)의 자격으로 2계(二階)를 초자(超資)받아 숭덕대부(崇德大夫)에 올랐으나,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613년(광해군 5) 폐모의 논의가 일어났을 때, 아버지가 국구인 김제남(金悌男)과 친교가 깊다 하여 화를 입었다.
자신도 폐모론의 정청(政廳)에 불참하였다. 하여 김류(金) 등과 함께 10사(十邪)로 불리면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인조반정 후 1625(인조 3) 회맹공신(會盟功臣)책봉 때 구공신적장자(舊功臣嫡長子)로 가자 (加資)되었으며, 혜민서제조(惠民署提調)에 서용되었다. 1638년 동지 겸 성절사 (冬至兼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금양군(錦陽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어려서부터 문예에 능하였고, 특히 서도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서법은 중국의 오흥(吳興)을 따랐는데, 참판 박이서비(朴敍碑), 영흥부사 이수준갈(李壽俊碣) 등의 유필이 남아 있다.  장유(張維)· 정홍명(鄭弘溟)과 교류하였다.  조카 세채(世采)가 행장을 짓고, 송시열(宋時烈)이 묘비명을 지었다.

 박호(朴濠 1586 - 1667)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는 백유(伯遊)이며, 반남박씨 14세손이고 남곽공 東說(동열)의 아들이다.  첫족보 서문을 쓴 박미(朴?) 와는 4촌 간이다.  1626년 남평현감, 1631년 부여현감, 1638년 영천군수(1638-1642), 1648년 호조정랑(戶曺正郞)으로 재임되었으며, 1651년 남원목사, 1656년 군자감정(軍資監正), 1666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등을 역임 하였다.

 박회무(朴檜茂 1575 - 1666 ) 조선 중기의 의사(義士). 반남박씨 13세손으로. 자는 중식(仲植), 호는 육우당(六友堂).숭정야로(崇禎野老). 목사 승임(承任)의 손자이다. 1606년 사마시에 합격.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서 왕이 강화도로 몽진하자 의금부도사로 왕을 호종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출정하였으나 이미 화의가 성립되어, 통곡하며 되돌아와 두문불출하고 소나무,전나무,매화,대나무,연,국화를 심고 애완하며 여생을 마쳤는데, 육우(六友)라는 호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영천의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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