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공휘승임묘갈명(嘯皐公諱承任墓碣銘)
나는 젊었을 때 전(田) 교관공(教官公)으로부터 《한서(漢書)》를 배웠는데, 배우는 여가에 대사간(大司諫) 박소고(朴嘯皐) 공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물리지 않았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장인의 사람됨은 침착하고 담박하셔서 특별히 좋아하시는 것이 없었는데 유독 책만은 무척 좋아하여 잠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책을 사거나 받으시면 번번이 붉은 먹을 갈아 일일이 점을 찍어가며 읽으셨는데, 비록 《의례(儀禮)》, 《강목(綱目), 《주자대전(朱子大全)》, 《어류(語類)》 같이 권질이 많은 책들도 모두 몇 십일이면 읽기를 마치셨다.” 전공은 본래 무책임한 말씀을 하지 않는 분이기에, 나는 이런 얘기를 들으면 좋아하면서 몇 번이고 선배가 학문에 힘쓰시는 것이 나 같은 후학이 미칠 수 없다는 점을 감탄하였다. 그 후에 돌아가신 학유(學諭) 김천영(金天英) 군과 함께 《역학계몽(易學啓蒙)》의 〈당기(當朞)〉 장(章)에 대해 논한 일이 있다. 그는 어려운 글을 무척 쉽게 읽고 계산을 하는데 말하는 대로 손을 놀리는 것이 모두 법에 들어맞았다. 그 내력을 물으니 소고선생으로부터 배웠다고 하였다. 그러니 소고선생은 이 학술에 대해 정통하고 묘리를 깨달은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공이 책에 힘을 쏟은 것이 단지 사장(詞章)을 읽는 데만 그치지 않았음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문하(門下)에 가지 못한 것이 평생의 불행이 되었다. 최근에 공의 아들인 도사군(都事君)이 책을 가져오고 김중청(金中淸) 군이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아! 내가 어찌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끝내 사양하지 못했으니, 단지 그들의 부탁이 무척 공손할 뿐 아니라 내가 평소에 경모하던 마음을 갚으려 했기 때문이다.
삼가 살피자면 공의 성은 박씨(朴氏)이고 휘(諱)는 승임(承任)이며 자는 중보(重甫)이다. 선조는 나주(羅州) 분으로서 고려의 우문관직제학(右文館直提學) 상충(尙衷)의 후손이며, 본조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인 좌의정(左議政) 평도공(平度公) 은(訔)의 6세손이다. 증조부는 병균(秉鈞)인데 사온서령(司醞署令)으로 좌통례(左通禮)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숙(䃞)인데 부사직(副司直)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형(珩)인데 성균관 진사로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예안(禮安) 김씨(金氏)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이 분들은 모두 공이 현달하셨기에 추증된 것이다.
공은 날 때부터 자질이 빼어났다. 어렸을 때 《사략(史略)》을 배울 때 “무왕(武王)이 천하를 위해 폭군을 정벌했는데, 어찌하여 상(商)나라 종실(宗室)의 미자(微子) 같은 현자를 왕으로 세우지 않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였다. 참판공은 그를 무척 뛰어나다고 여겼다. 15세가 되기 전에 문장이 이미 무르익어 향시(鄕試)에 응시하려 했는데, 참판공이 너무 이른 나이에 명성을 얻을 것을 걱정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변려문 50여 구를 지어 소회를 서술하니, 보는 이들이 모두 경탄하였다. 이때부터 명성이 크게 나서 여러 번 향시에 장원을 하였다. 24세에 진사가 되었고 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발탁되었다. 수년 동안 예문관(藝文館), 홍문관(弘文館), 승정원(承政院)의 여러 자리를 옮기며 참하(參下)의 요직을 모두 거쳤다. 또한 정자(正字)의 직책으로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한 것은 세상에 드문 일이었다.
가정(嘉靖) 을사년(1545)에 인종께서 성덕(聖德)으로 왕위에 올랐다. 옥당(玉堂)에서는 만여 글자의 차자(箚子)를 올려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 의례와 법률을 바로잡는 도리, 교화하고 기강을 바로잡는 책무에 대해 논하였는데, 이 글은 공이 초안을 잡은 것이었다. 수찬(修撰)으로 승진하고, 얼마 후에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전임되었다. 한 동료가 적당치 않은 사람을 전형(銓衡)에 등용하려 하였는데 공이 그 일을 반대하자 공을 정언(正言)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 사람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 전에 진복창(陳復昌)은 공에게 큰 명성이 있다는 이유로 농락을 하려고 부지런히 요청을 했었으나 공은 끝내 그를 만나지도 않았다. 이때는 진복창이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세력이 대단했었는데 공이 그를 탄핵하려고 하였다. 같이 있던 사람들이 의견을 따르지 않자 그 다음 날에 하직 인사를 하고 남쪽으로 귀향하였다. 얼마 후에 체직(遞職)되었는데 복창은 이기(李芑)를 부추겨 장차 엄한 법률로 다스리려 일을 도모하였는데, 이원록(李元祿)이 힘써 그 일을 막아 공을 예조정랑(禮曹正郞)에서 파면하는 것으로 그쳤다.
무신년(1548) 정월(丁月)에 모친상을 당하고 그 다음해에는 부친상을 당했다. 탈상(脫喪)한 뒤에 현풍현감(玄風縣監)에 임명되었다. 그 해에는 흉년이 들었고 백성들은 전염병으로 고생하였다. 감사(監司)는 공에게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있다고 여겨 여러 읍(邑)을 진휼(賑恤)하는 일을 맡겼다. 공은 쓰러져 죽은 사람들 속을 뛰어다니면서 온 마음을 다해 구제하였으니 그로 인해 살아난 자가 무척 많았다.
정사년(1557)에는 직강(直講)에서 사예(司藝)로 자리를 옮겼는데 당시에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을 맘대로 휘둘렀다. 공은 관직에 흥미를 잃고 문을 닫아걸고 독서만 하여 절대로 그에 물들지 않았다. 그 다음 해에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나갔는데, 군에 폐해가 극심하여 창고가 텅 비어 있었다. 혹자는 공에게 전임 군수 때문에 재정이 비게 된 사실을 신고하라고 권하였으나 공은 의리상 불가한 일이라고 여겨 자신의 봉급을 줄이고 낭비되는 예산을 축소하여 재정을 충당하고 문서는 태워버렸다. 군수의 임기가 다 되어 교감(校勘)으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얼마 후에 군자정(軍資正)이 되어 판교(判校)로 자리를 옮겼다. 을축년(1565)에는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승진하였고 병인년(1566)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옮겨서 반년을 지낸 뒤에 체직되어 진주목사(晉州牧使)로 부임하였다. 깨끗하게 다스렸기에 번거롭게 처벌을 하지 않더라도 간악한 이들이 두려워하였다.
선조 2년 기사년(1569)에는 하사(賀使)로서 명(明)나라 경사(京師)에 갔다. 전례에 따르면 예부(禮部)에서는 현당례(見堂禮)가 있고, 홍려(鴻臚)【鴻은 聲, 臚는 傳의 뜻으로서 外國의 國寶을 接待하는 官名】에게는 없었다. 목종 초에 비로소 문관을 홍려경(鴻臚卿)으로 삼아 그 직임을 중시하였으니 예법상 당연히 상견례를 해야 했으나 사신(使臣)은 단지 전례대로만 하였다. 홍려가 노하여 사신의 격을 낮추어 그 서열을 중의 무리와 잡류(雜流)의 아래로 내려버렸다. 사신이 머리를 숙이고 대열에 나아갔으나 실수에 대해 제대로 변명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공이 이르러서는 예부에 글을 올려 논변을 주고받고서는 마침내 서열을 전처럼 제대로 할 수 있었다. 그 후 임금이 중국에서 온 기별을 보니 조선의 사신이 실례(失禮)를 하여 서열이 내려졌다는 말이 있었다. 전후의 역관들에게 사정을 물어보니 모두가 자신들이 간 이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하였는데 공은 끝내 스스로 그 일을 밝히지 않았다. 임금이 시기를 헤아려 사신 일행의 죄를 물으니 사람들은 모두 임금의 현명함을 칭송하고 공의 아량에 감복하였다.
신미년(1571)에 황해도(黃海道) 관찰사를 지내고 임신년(1572)에 내직으로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선조 6년(1573)에는 도승지(都承旨)로 자리를 옮겼고, 갑술년(1574)에는 외직으로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었다. 경주부에는 집경전(集慶殿)이 있어서 태조의 영정이 봉안하고 있었는데 그 영정을 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모두 열어 보였다. 공은 이처럼 무람없이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관리하는 이 외에는 마음대로 열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신라시대에 사용하던 폐원(廢苑)이 무척 넓어서 기장과 조 수십 섬을 심을만한데도, 채소 따위를 그곳에 재배하여 관용으로 있었으며 오이도 지나치게 많이 심었으나 백성들을 부려 거둬들이지 못했다. 공이 그 땅을 십등분하여 그 가운데 아홉을 둔전(屯田)으로 하자 백성들이 매우 편리하게 여겼다.
병자년(1576)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정축년(1577)에는 강화부사(江華府使)가 되었다가 사고가 있어 체직되었다. 바로 얼마 후에 여주목사(驪州牧使)가 되어 서원(書院)을 짓고 묘사(廟祠)를 세워 김안국(金安國) 공을 모셨다. 백성들 가운데 재산이 많으면서도 모친을 박대하는 이가 있기에 공이 잡아다가 깨우치니 그 사람이 절을 하면서 죄를 자복하였다. 그 후로는 모친을 극진히 모셔 효자로 소문이 났다.
신사년(1581)에 춘천부사(春川府使)로 갔다가 다음해에 병 때문에 귀경하였다. 계미년(1583)에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있다가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당시에 조정의 의론이 분열하여 여러 당파로 나뉘었는데, 공의 언사가 임금의 뜻을 거슬렀기에 창원부사(昌原府使)로 좌천되었다. 임기가 다 끝나기 전에 돌아오도록 하였는데 이는 왕의 특명이었다. 다음해인 병술년(1586)에 70세의 나이로 병이 들어 본가에서 돌아가셨다. 평소 지내던 영주군(榮州郡) 동림구촌(東林丘村)의 진향(震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곳은 공의 외조부인 김만일(金萬鎰)의 묘 아래였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공의 덕을 추모해서 사당을 세웠으며 제사를 지냈다.
공은 풍채가 준수하고 도량이 아주 넓었으며 차분하여 말이 적었고 기쁨이나 슬픔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병이 있지 않으면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공과 오랫동안 같이 있더라도 그러한 모습의 한계를 볼 수 없었다. 읽지 않은 책이 없었는데, 특히 《논어(論語)》와 《주자서(朱子書)》에 힘을 써서 의문이 있으면 곧바로 기록해두었다가 여러 번 세밀하게 연구해서 반드시 깨닫고자 하였다. 일찍이 퇴계(退溪) 선생에게 질의하여 많은 인정을 받았다. 퇴계 선생이 편찬한 《계몽전의(啓蒙傳疑)》 가운데 상수(象數)에 대한 여러 사람의 난해한 해석들을 모아 하나하나 연구해서 각기 그 뜻을 궁구해 내었다. 심지어 별자리와 수학 등에 관한 것까지 익숙히 깨닫지 못한 것이 없었다. 대개 공이 한 가지 재주에만 국한되지 않았음이 이와 같았다.
담박함을 좋아하는 성품이었으며 의식(衣食)은 따뜻하고 배부를 정도였으면 만족하였고, 사는 집은 담장이 허술하였다. 서울에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이 집을 빌려 살면서도 태연하게 개의치 않고 지냈다. 벗들과 노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가볍게 의론을 하지도 않았으며, 비록 벼슬을 하고 있더라도 퇴근하고 돌아오면 곧 문을 닫고 조용히 공부하였다. 자제들이 혹 시사(時事)에 대해 물으면 ‘너희들이 간여할 일이 아니다’라 대답하였고, 후학들이 배우기를 청하면 비록 몽매한 이들이라도 모두 온 마음을 다 쏟아 가르쳤다.
글을 쓸 때에는 남의 눈길을 끌고자 하지 않았으나 그 글이 성대하여 마치 지나치게 마음을 쏟지 않는데도 자연스럽게 웅건하고 전아한 글이 된 것 같았다. 남들이 미치지 못할 정도였으나 그래도 공은 이것으로 자만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원접종사(遠接從事)를 지낼 때에 들렸던 정관(亭館)에서도 시를 짓지 않았고, 혹 수창을 하더라도 판에 새겨 걸지는 않도록 하였으니, 이는 자신의 능력을 남에게 자랑하지 않고자 해서였다.
중년 이후로는 더욱 시를 짓지 않으며, ‘시는 사람을 경박하게 만드니 거기에 마음을 지나치게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공문심법유취(孔門心法類聚)》와 《강목심법(剛目心法)》 등의 책을 지었는데 탈고되지는 않았다. 문집 4권이 간행되어 세상에 전한다.
공의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예천(醴泉) 권씨(權氏)로 집의(執義) 오기(五紀)의 따님이다. 효성이 있고 근검하여 부인의 도리를 극진히 하였다. 모친상을 당하고 너무 애통해 하다가 병이 생겨 53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다른 곳에 장사지냈다가 공이 돌아가신 후에 옮겨서 부장(附葬)하였다.
장남 어(漁)는 요절하였고, 차남 녹(漉)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이며, 3남 조(澡)는 진사이며, 4남 개(溉)는 측실의 소생이다. 장녀는 증판결사(贈判決事) 이복원(李復元)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전극례(田克禮)에게 시집갔는데, 바로 그가 공의 일을 말하기 좋아하던 이다. 녹(漉)의 장남 회무(檜茂)는 금부도사(禁府都事)이고, 차남 기무(機茂)는 진사이다. 딸은 찰방(察訪) 김기선(金幾善)에게 시집갔다. 조(澡)의 장남은 재무(梓茂)이다. 딸은 주부(主薄) 이경윤(李慶胤)에게 시집갔다. 이복원의 아들은 다섯으로, 지(遲)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고, 준(遵)과 적(適)은 모두 참봉(參奉)이며, 형(逈)과 건(建)은 첨정(僉正)이다. 딸은 셋인데 장녀는 증도승지(贈都承旨) 고종후(高從厚)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이근곤(李根坤)에게 시집갔고, 3녀는 김극전(金克銓)에게 시집갔다. 전극례의 아들 현룡(見龍)은 요절하였다. 딸은 둘인데 장녀는 사인(士人) 홍처약(洪處約)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선전관(宣傳官) 김기선(金起先)에게 시집갔다. 이밖에 내외(內外)의 증손(曾孫)과 현손(玄孫)이 모두 140여 명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대아시(大雅詩)가 멀어지니 문장을 숭상하여 공교해지고
가진 것은 기르지 않고 사장으로 공을 세운다.
보고 들은 일 표절하는 것은 자기로부터 나온 문장이 아닌데
뛰어나도 어두운 것이요 화려해도 경박한 것이다.
오직 공만은 학문을 쌓아 날로 성장을 하셨네.
위로는 서경(書經)을 연구하고 널리 백가(百家)를 고루 찾아
문장으로 드러나니 혼후(渾厚)하고 광채가 났네.
저 강하(江河)에 비유하면 원류가 멀리 흐르는 것과 같은데
보다 더 큼 있었으니 문예는 단지 말기(末技)였다.
가정에선 효제(孝悌)하니 수행(修行)이 깨끗했고
큰 근원을 사색하니 깊은 것들 다 탐구하였네.
내게 와서 구할 때는 지남거(指南車)와 같이 하고
강석(講席)에서 가르치고 혹 사륜(絲綸)을 맡으셨네.
왕의 책략을 빛내어 만인에게 시행하니
밝은 세상 만든 것은 공의 노력 덕분이었다.
후인이 상고하려거든 이 비각(碑刻)을 볼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