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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는 원래 신라에서 나왔는데 지영(枝榮)이 산포되어 주군(州郡)에 나뉘어 살아서 아래로는 민예(珉隸)가 되기도 하고 위로는 공경대부가 되었으니, 이를 모두 헤아릴 수가 없었다. 각각 그 세계를 기록할 수 있는 것으로써 조선(祖先)을 삼고, 조선(祖先)이 일어난 것으로써 드러내고 호장(戶長) 응주(應珠)로써 조선을 삼은 이가 우리 일족이다.
우리 일족이 세상에 보인 때는 고려말에 해당하며, 본조(本朝)에 이르러 비로소 번성하여 지금까지 300년 동안 더욱 번대하여져서 여러 성씨의 으뜸이 되었다. 어(語)에 이르기를 『뿌리가 깊으면 가지가 무성해지고, 근원이 멀면 흐름이 깊다』 라 하였으니 이 말이 어찌 관면벌열(冠冕閥閱)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저처럼 그 공덕이 전세에 쌓이고 경택이 후대에 번지고 넘쳐서 하늘이 장차 이로써 세상의 징험을 삼는 것이다. 우리 일족의 번연 창대함이 이와 같으 니 보첩을 만들기를 상세하게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구보(舊譜)는 소략한 점이 있고, 또 수십년 전에 만들어서 뒤에 출생한 이가 수록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계승되지 못한 세계를 접속하고 결핍된 글을 보완하는 일은 장차 반드시 기다림이 있었다.
족제 세채 화숙(族弟 世采 和叔)이 처음 이 보첩을 시작하였더니, 중년에 족질 태징(泰徵)에게 부탁하여 무릇 17년 만에 성취되었다. 일찍이 소략하던 흠이 있던 것을 상세하게 하지 않음이 없고, 늦게 난 후사를 모두 소록했으며, 이 밖에 천와(舛訛)를 이사(移徙)한 것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 예는 분묘(墳墓)의 소재와 처음 이사한 거처를 반드시 적은 것은 원조를 추모하고 족파를 분변하는 까닭인것이다. 딸의 아들을 대서(大書)의 예에 두지 않은 것은 속류(俗謬) 를 바로 잡고 이성(異姓)을 구별하는 까닭이며, 벼슬을 하고 안한것, 모씨에게 장가든 것, 향년이 얼마이고 모일에 죽었다는 것을 반드시 갖춰 적은 것은 소 씨(蘇氏)의 보첩에서 뽑아 그 좋은 점을 채용한 것이다.
나는 이를 인하여 감동 받음이 있어서 명윤(明允: 蘇洵의 字)이 친친하는 도리에 박절했던 것이 인자함이 못됨을 안타까워한다. 그는 보첩을 만듦에 있어서 위로는 고조(高祖) 아래로는 아들에게서 그치고, 방계는 시마에 그쳤으니 이와 같이 하고 이르기를 『우리 보첩을 보는 이는 효제의 마음이 유연히 생기리라 』하면 또한 너무 하지 않은가? 그는 장차 큰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그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로 여기지 않고 그 아들을 아들로 여기지 않으며, 기공의 친족 보기를 도인(途人)처럼 하게할 뿐이었으니 그러고도 홀로 후한 것인가? 대저 보첩을 만들어 기록하는 것은 실망(失忘)이 없고자 함이니, 천하에 고조증 조의 이름이나 관작을 만들어 이디에 쓰겠는가? 이에 이르기를 『행여 도인(途人)에 이르지 말아 홀연히 잊어 버림이 없게 하라 』하였으니, 고증 시공조차 도 오히려 보첩 만들기를 기다린 뒤에야 잊어버리지 않아 도인(途人) 됨을 겨우 모면 할 뿐인가? 소씨가 친친의 도리에 너무 박절하지 않은가? 예전에 사마천이 사기를 만들 때 황제 이래 씨성의 소출을 상세하게 기재하지 않음이 없고, 또 많이 그 대수를 저술 했으니 만약 옛날에 보첩이 없었고 또 보첩을 만드는 이가 모두 소씨와 같이 했다면 거기에서 무엇을 취하겠는가?
지금 이 보첩이 저술한 바는 호장으로부터 우리 형제에 이르기까지 15세가 되고, 우리 형제의 손자에 이르기까지 또 3세가 되니 이 아래는 특히 아직 보이지 않아 기록이 없을 뿐이며 그 방지(旁枝)와 별통(別統)이 스스로 각각 동종(同宗)이 되는 이를 모두 수록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 밖의 것은 특히 징빙(徵憑)이 없어서 아직 수록하지 못하는 것 뿐이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친친(親親)의 의리를 넓혀 그 극을 쓰지 않음이 없는 까닭이다.
아! 아들로부터 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가고,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더듬어 내려가는 18대 사이가 부자의 친 아님이 없다. 나 자신에 있어 이미 그러하고 내 일족이 또한 그러하여, 이를 말미암아 만파(萬派)가 동원(同源)임을 생각하고 천지(天地)가 일근(一根)임을 살피면 반드시 장차 정의(情誼)를 금하지 못하 는 바 있고, 의리를 차마 금치 못하는 바 있을 것이니 어찌 친진복소(親盡服疏)하다 하여 보기를 도인(途人)과 같이 하기에 이르겠는가?
숙종 9년 1683년 박세당(朴世堂)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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