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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경북 영주시 문수면 권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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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0년경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에서 살던 낙남선조 9세 좌부승지공 숙의 맏아들 침(琛)선조는 안동에서 영주군 문수면 원정골로 이사를 하셨습니다. 침(琛)의 맏아들 승장(承張)의 외가인 장수면 녹동에서 세거(世居)하였으며 고랑골은 15세 내길(來吉) 처길(處吉) 재종 형재가 1637년경 입향하여 살면서〔반남박씨(潘南朴氏) 야성송씨(冶城宋氏) 풍산유씨(豊山柳氏) 인동장씨(仁同張氏) 옥천전씨(沃川全氏) 전의이씨(全義 李氏) 의성김씨(義城金氏) 평해황씨(平海黃氏)〕와 합심(合心)하여 8개 문중(門中)이 난고서당(蘭皐書堂)을 창건(創建) 하였으며, 내길(來吉)과 처길(處吉)의 후손들은 살고 있는 마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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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면 고란골을 가는 길은 영주시의 남쪽에 있는 적서교를 건너서 영주시 문수농공단지로 들어가면 됩니다. 본래 榮川郡 權先面 소재지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權先洞이 되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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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3년 반남박씨 박내길(來吉-호蘭谷) 先生이 종형제, 7개 문중과 함께 蘭皐書堂을 짓고 學文을 가르쳤다 하여 蘭皐書堂(난고서당)의 皐(고)字와 박내길 선생의 호인 蘭谷의 첫 이름자 蘭字를 따서 고란골(皐蘭 일명 고랑골)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마을 입구에는 반남박씨의 세거(世居)를 표시한 유래비가 있으며, 난곡정, 연방정, 난고서당 등의 유적지를 볼 수 있다. 농촌을 떠나는 이농(離農)으로 마을의 많은 집들이 비어있고 노인들이 많아 분위기는 예전 같지는 않지만 우리 반남박씨 판관공파 선조들이 영주에 정착하면서 살아가던 세거지(世居地)이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문수면 권선리 고란골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무섬마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영주시에서 안동방향 국도 적서교차로에서 적서교를 건너서 약5Km 정도 들어가면 됩니다.(문수농공단지 뒷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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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곡정(蘭谷亭): 박내길(來吉 1624-1710) 호(號) 난곡(蘭谷), 난고서당(蘭皐書堂)을 창건(創建)하여 후학에 힘씀, 경북 영주시 문수면 권선리(난곡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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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고서당(蘭皐書堂) 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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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고서당의 옛모습(1980년대) 주사와 서당건물이 남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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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고서당(蘭皐書堂) 기(記) 조선조 현종 14(1673)년에 재종 형제 두 분-내길(來吉)과 처길(處吉)-이 7개 문중의 힘을 합쳐 영주시 장수면 녹동에서 난곡(蘭谷)으로 이거(移居)하여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권선리 난곡 마을 앞산 등맥(嶝脈)에 둘러싸인 곳에 난고서당(蘭皐書堂)을 세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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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고서당(蘭皐書堂) 전경 2006년 3월 촬영, 주사는 허물어지고 서당본체만 남은 모습 보수와 정비가 필요함 위치: 경북 영주시 문수면 권선리(난곡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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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현종 14(1673)년에 반남 박씨 선조 호장공(戶長公)의 15세손(世孫)이고 태종조(太宗朝)때에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평도공(平度公) 은(?)의 10세손이 되는 가선대부 용양위 부호군(嘉善大夫 龍?衛 副護軍) 내길(來吉)과 당제(堂弟)인 동추공 처길(處吉) 두분이 같이 영주시 장수면 녹동에서 난곡(蘭谷)으로 이거(移居)하여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권선리 난곡 마을 앞산 넘어 2마장 정도(程度)의 거리(距離)가 되는 등맥(嶝脈)에 둘러싸인 곳에 난고서당(蘭皐書堂)을 두 재종 형제분(再從 兄弟分)이 주축(主軸)이 되어 향내(鄕內)의 뜻 있는 타 성씨 7개 문중〔야성 송씨(冶城 宋氏) 풍산 유씨(豊山 柳氏) 인동 장씨(仁同 張氏) 옥천 전씨(沃川 全氏) 전의 이씨(全義 李氏) 의성 김씨(義城 金氏) 평해 황씨(平海黃氏)〕와 합심(合心)하여 8개 문중(門中)이 창건(創建) 하였는데 5간 겹집으로 학사(學舍)를 건축(建築)하고 주소(廚所)를 세우고 학전(學田)을 마련한 뒤에 인척(姻戚)이 되는 풍산 류씨(豊山 柳氏)의 서애 류성용(柳成龍)의 현손(玄孫)이 되는 희지(熙之)를 초창기(初創期)에 사부(師傅)로 모시고 향내(鄕內)의 현자제(賢子弟)들을 모아서 경학(經學)과 도학(道學)과 예서(禮書)를 교학(敎學)해서 영재양성(英才養成)에 진력(盡力)하여 수많은 생원(生員)을 환로(宦路)에 배출(輩出)하여 국가(國家)에 공헌(貢獻)한바 컸으나 그 후 한일합방(韓日合邦) 일제(日帝)의 탄압(彈壓)을 받아 오면서 점차약화(漸次弱化)되였으며 광복 후 제정(制定)된 교육법(敎育法)에 의해 학제(學制)가 정비 되면서 점차(漸次) 사라져 가게 되어 현재는 건물만이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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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정(聯芳亭) 박 숭고(崇古 1676-1733) 와 박민고(敏古 1680-1756)을 기념하기 위한 정자 1976년 건립, 형제로 숙종때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한 쌍의 아름다운 보옥(寶玉)의 영예(榮譽)를 누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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